땋았음에도 불구하고 산발인 머리카락은 더 이상 정리하지 않고 이마를 죄 덮어 눈썹 따위 다 가린 백금빛 앞머리를 치워내지도 않는다. 쌍꺼풀 없는 눈, 어느 화가가 즐겨 마셨다는 술이 떠오르는 색의 눈동자. 자연스럽게 달아오른 뺨은 잡티 없지만 건조하다. 흐리멍덩한 낯, 뽐낼 것도 없으면서 닿아오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긴 손가락이 사랑하는 유령을 쓰다듬었다. 오른손 검지의 반지가 빛을 받아 반짝인다.
얌전한데 얌전하지 않고 침착한데 침착하지 않다. 보통 방종하다. 자주 윙크하고 자주 자기 뺨을 찌르며 자주 혀를 내민다. 손키스를 한번 거절당하면 여섯 번쯤 더 날린다. 자기가 깜찍하다느니, 이 깜찍함을 관람했다면 응당 이걸 해줘야 한다느니 너스레를 떤다. 자기애가 넘치는 것보단 뻔뻔하게 구는 데에 재능이 있는 쪽이다.
그렇게 뻔뻔하게 늘어져 입만 놀린다. 굳이 사건의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지만 누군가 응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잡음을 출력하는 스피커 역을 자처한 셈이다. 스피커는 직접 행동하지 않으므로 책임지지 않고 책임지지 않을 것이므로 직접 행동하지 않는다. 애매하게 끼어드는 것은 딱 질색이다. 철없는 완벽주의가 그를 깎아냈다. 라뉴 클레망은 행동하지 않는 것 또한 행동하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철저하게 무능하다. 그의 무치가 성정이라면 관조는 선택이었다.
그 선택이 라뉴 클레망을 관계에서 유리시킨다. 의도적으로 남과 거리를 두면서 말버릇은 "알잖아"다. 공평하게 무관심하면서 공평하게 친밀한 척 군다. 너에 대한 것은 곧잘 잊으면서 네 재능은 잊지 않는다. 모순. 그래서 오히려 종잡을 수 있다. 지극히 사람답지만 내 사람으로 두고 싶지는 않다.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으면서 지루해, 말하는 게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니라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필요한 일은 하기 싫다. 그건 필요한 일이니까.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가. 라뉴 클레망은 좋게 말해서 견고하고 나쁘게 말해서 아집이 있다. 하지 않고자 마음먹은 것은 하지 않고 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한다. 제 한 몸 불사 질러 이 밤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다면 그으리라…. 무능해서 못 긋겠지만.
제4도시의 커다란 사각형 집, 클레망의 밤 혹은 클레망의 식충.
도통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뿐, 행동 하나하나는 퍽 크다. 은근히 의미 없는 제스처가 잦고 몸이 유연하다. 본인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도 작은 키가 아닌지라 도드라지는 편이다.
일곱을, 우리의 슌-허노르를, 인공적인 낮과 밤을, 안전과 여유, 필요 없는 것들과 나의 무능, 나의 유령을, 남의 온갖 재능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사랑한다. 사람보다는 그가 가진 재능에 몰두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건 필요한 일이니까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러나 그 찬란한 어느 것을 피하지는 못하겠다고.
정작 본인은 끔찍하게, 무언가 만드는 것에 재능이 없다. 아무리 관찰하고 따라해도 소용없었다. 뭘 해도 아류다. 그걸 알고 아주 어릴 적부터 손을 털었다.
슌-허노르로 터전을 옮기기 전까지 꾸준히 '예술가를 배출'한 집안이다. 직접 되기도 했고 후원하기도 했다. 그들은 대체로 순수하게 예술을 사랑했다. 음악, 미술, 무용… 가리지 않았다. 이제 와서는 일원 중 대다수가 예술계로 빠지는 집안 정도로 치부된다. 관심이 있다면 클레망이라는 이름이 퍽 익숙할만하다. 어린 미술가의 인재 리쥬아르 클레망이 그의 동생이다.
7살, 낮잠을 자며 흘린 유령으로 양육자가 능력의 발현을 확인했다. 입가에 새카만 그림자 같은 것이 흩어져 있었다.
특이능력으로 무언가 만들어낼 때, 모방한 것의 모본이 생명체인가 아닌가를 퍽 분명하게 구분한다. 모본이 생명체라면 '유령'이라고 호칭하지만 아니라면 호칭하지 않으며, 조형 이후 추가적으로 컨트롤하지 않는다. 그건 죽은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낸 죽은 구슬로 종종 구슬치기를 한다.
프로젝트가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몰두하지 않는다. 우르에서의 훈련을 최대한 미루고 미루다가 겨우내 해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건 하나도 여유가 없잖아. 절실해 보이고…. 자신보다 적합한 이가 있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낙천이 심한 건지 자존감이 낮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얌전한데 얌전하지 않고 침착한데 침착하지 않다. 보통 방종하다. 자주 윙크하고 자주 자기 뺨을 찌르며 자주 혀를 내민다. 손키스를 한번 거절당하면 여섯 번쯤 더 날린다. 자기가 깜찍하다느니, 이 깜찍함을 관람했다면 응당 이걸 해줘야 한다느니 너스레를 떤다. 자기애가 넘치는 것보단 뻔뻔하게 구는 데에 재능이 있는 쪽이다.
그렇게 뻔뻔하게 늘어져 입을 놀린다. 굳이 사건의 한 가운데 자리 잡아 잡음을 출력하는 전화기를 자처한다. 응하는 이 없어 전화기가 스피커 될 위기에 처하면 “이봐.” 주의를 끈다. 고작 ‘말하는 것’ 또한 행동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행동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책임을 지고 책임지고 싶지는 않지만 행동한다. 애매하게 끼어드는 것은 딱 질색이지만 모든 일에 완벽하게 끼어들 수는 없다. 철없는 완벽주의가 고개를 숙였다. 라뉴 클레망은 철저하진 못해도 적당히 무능하도록 한다. 누워있는 사람은 뭘 해도 무능해 보이지 않나? 그의 무치가 성정이라면 무능은 선택이었다.
그 깨달음이 라뉴 클레망에게 큰 변화를 주지 못했다. 의도적으로 남과 거리를 두는 것을 그만두었으나 말버릇은 여전히 “알잖아”다. 여태 공평하게 무관심하고 공평하게 친밀한 척 군다. 너에 대한 것은 곧잘 잊으면서 네 재능은 잊지 않는다. 이유를 물으면 평범하게 대답했다. 네가 싫은 건 아냐…. 패드에 어떤 문장을 적었다. 대답하는 중에도 일단 시작한 일은 해야지.
어떻게 이리도 꾸준할 수 있는가. 라뉴 클레망은 견고하게 짜였다. 남이 무너뜨리고자 결심한 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나이는 지났지만 결코 본인은 잃지 않는다. 제 한 몸 불사 질러 이 밤에 한 획을… 긋지 못하겠으니, 그냥 제 서재에나 한 획을 긋기로 했다. 무능해서 오래 걸리겠지만.
제4도시의 커다란 사각형 집, 클레망의 밤 혹은 클레망의 취객. 말과는 다르게 취하는 일은 거의 없다. 도통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뿐, 행동 하나하나는 퍽 크다. 은근히 의미 없는 제스처가 잦고 몸이 유연하다. 본인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도 작은 키가 아닌지라 도드라지는 편이다. 술과 일곱을, 우리의 슌-허노르를, 인공적인 낮과 밤을, 안전과 여유, 필요 없는 것들과 나의 무능, 나의 유령과 그의 유능을, 남의 온갖 재능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내가 보지 못한 지상의 새로움을 사랑한다. 여전히 사람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 찬란한 것들이 세상에는 많다. 정작 본인은 끔찍하게, 무언가 만드는 것에 재능이 없다. 아무리 관찰하고 따라해도 소용없었다. 뭘 해도 아류다. 그걸 알고 패드에 사실만을 기술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미루고 미루다가 시작했으니 이제 네달쯤 됐나.
예술가 집안. 5년 전 젊은 미술가의 인재 리쥬아르 클레망이 제4도시 안의 큰 대회에서 상을 탔다. 같은 해 얀 클레망이 돌연 바이올린을 그만두었다. 4년 전 폴리 클레망이 빛을 주제로 사진전을 열었다. 2년 전 꾸준히 블로그에 시를 쓰던 클레망의 시집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 좁은 도시에 클레망이 어쩌나 많은지…. 라뉴 클레망은 조용했다.
특이능력으로 무언가 만들어낼 때, 모방한 것의 모본이 생명체인가 아닌가를 구분하기를 그만두었다. 뭐든 내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그게 '유령'이고 '생명체' 아닌가? 마음껏 형태를 바꾸고 움직인다. 뭐든 사랑스러운 나의 유령이다. 가끔 죽은 구슬을 만들어내 구슬치기를 하긴 한다.
2년 전부터, 프로젝트가 가치 있는 것이라고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남의 향수는 알 바 아니고, 모든 '새로움'을 만끽하기로 했으므로…. 그래도 훈련은 최대한 미루고 미루다가 겨우내 해냈다. 지상이 보고 싶은 건 보고 싶은 거고, 귀찮은 건 귀찮은 거고, 무능한 건 무능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