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자 크기

작게

보통

크게



Ginger Nar Brown

 

 

 

진저 나르 브라운은 손에 쥔 미색 천을 내려다본다. 그는 그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과 거의 바뀌지 않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 손을 놀린다. 이제 서툴지 않은 바느질과 바늘에 찔리는 것이 무뎌진 손끝에서 그가 처음 자수를 두었던 때보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집에서 가장 빛이 잘 드는 곳에는 따스하고 익숙한 것들이 자리했다. 그가 앉은 소파를 둘러싼 원목 프레임에 남은 낡은 흔적은 이 집에 오래 살았던 흔적을 보였는데 이제까지 그 자리는 나르 소남 체첵이 종일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을 때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고, 그 기억의 대부분은 집안 곳곳에 장식된 천의 자수에서 한 올씩 흘러 한참을 머물다 가곤 했다. 과거를 담은 조각이 다시 허공에 흩어지고 나서야 진저는 자신이 어디까지 손을 두었는지 실을 헤아리고 색을 고르고 바늘을 손에 들었다. 그가 두는 자수는 보통 두 종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어떤 형상을 자기식으로 구현한 신식의 디자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윗대에서 이어 내려오는 전통적인 디자인이었다. 그는 그 둘에 큰 차이를 두지 않았지만, 전자를 조금 더 어려워하곤 했다.

     인공태양의 밝았던 빛이 사그라질 때까지 같은 자세를 유지한 그가 허리를 편다. 절로 나오는 소리와 어깨의 뻐근함이 뒤따랐다. 길게 팔을 뻗어내며 스트레칭을 하다가 손에 들린 천 위에 새겨진 미완성된 붉은 꽃잎을 손끝으로 매만진다. 이내 그 손에는 다시 바늘이, 붉은 실이 쥐어지고 몸에 익은 동작이 이어진다. 진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던 일을 반복하는 것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기계처럼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머리는 그가 지금 앉은 자리에 있어야 했던 이를 떠올리곤 했다.  꽤 오랫동안 천을 오갔던 바늘은 너무 늦은 탓인지 그 소원을 이뤄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지금 멈춘다고 하더라도 그가 바라는 것은 하나였기에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유년 시절 진저 나르 브라운의 첫 기억은 할머니의 쓰다듬이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그 전부터 그의 할머니는 그렇게 쓰다듬어주셨을 터다. 어린 그는 할머니의 할머니는 어떤 사람인지 자주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 나르 소남 체첵은 진저와 닮은 -그러나 아주 같지는 않은- 눈동자로 먼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체첵은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곧잘 하곤 했는데, 분명 진저가 어떤 것을 쉬이 상상할 수 있는 이유는 체첵 덕분일 터였다. 체첵은 어린 손주에게 늘 완벽한 연기자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낮게 울리는 맹수 소릴 흉내 내면 진저는 아직 낡지 않은 소파의 원목 프레임을 꼭 붙잡았다가도, 동화 속의 영웅이 자신의 몸집보다 세 배는 큰 맹수를 눈앞에 두고도 겁에 질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쉽게 감탄 소릴 내곤 했다. 체첵은 여러 가지 색의 실이 꽂힌 바늘들을 흐트러짐 없이 들었다 놓았다 하며 이야기를 이어가곤 했다.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자면 색색의 실로 엮인 새로운 이야기가 천 위에 곱게 새겨져 있는 일이, 늘어나는 주름 사이에 새로운 이야기가 깃드는 것이 그들에게 일상이었다. 

     “할머니, 이건 뭐예요?”  둥근 것은 태양이다. 우리의 태양과 다르게 하나였지만 체첵은 그것이 태양이라고 했다. 그 답을 듣고 어린 손이 옮겨간 곳은 또 하나의 둥근 것이었다. 체첵은 달이라고 말했다. 달과 태양이 같은 것이냐 묻는 어린아이에게 그는 먼 옛날 하나의 하늘에 태양이 너무 많아 사람들이 너무 덥다며 호소하자 화살로 태양을 쏘아 맞춘 영웅의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러면 그날 밤의 진저는 지하의 인공 태양이 하나하나씩 어두워지고 단 하나 남은 태양이 달로 바뀌며, 꼬리가 두 갈래로 나뉜 제비가 눈앞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곤 했다. 시간이 흘러 땅을 알고, 이 지구를 알고. 지하와 지상을 알고 인공태양과 그것에 영사된 달을 알게 된 후로 진저는 체첵이 수놓은 것과 이 지하 세계를 비교해보곤 했다. 체첵의 자수는 도감이 되기도 소설이 되기도 했다. 평생을 그것과 함께 자란 진저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나르, 사람들이 왜 이 할머니의 자수를 찾는지 아니?”

     나르 소남 체첵은 종종 진저를 나르라 칭했다. 그것은 체첵의 성씨이기도 했지만 체첵은 자신을 그렇게 칭한 적이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이야기가 담겨서란다.” 낮고 선명한 목소리로 답을 이어간다. 어떤 소망이라도 바늘이 오간 만큼 바란다면 이루어지지 않겠냐며 체첵은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고 주문이 들어온 이의 이야기를 한참 바라보곤 했다. 체첵이 수놓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위한 자수, 자기 자신을 위한 자수, 이미지와 색에 대한 이유, 어떤 이야기에 대한 다른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보며 미소짓는 체첵을 보며 의문 가득한 낯을 품는 아이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이야기는 이미 젊을 적 질릴 만큼 두었고 평생의 소원은 이미 이루었다고 말했다. 온기 가득한 말과 함께 뻣뻣한 머리카락 위로 얹어지는 주름 잡힌 손은 모래 한 알만큼이나 가벼웠으나 수많은 이야기를 담은 거대한 손이었다. 그 손을 따라 진저 나르 브라운은 자수를 두기 시작했다.

 

 

*

 

     침대에서 쉽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작고 좁은 탁자 위에는 붉은 자수로 장식된 천이 자리했다. 병상에 누운 아흔이 넘은 노인이 선물을 받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진저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감히 다른 사람의 감정을 추정하건대 그 감정은 어린아이가 노인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기쁘고 슬펐을 것이다. 나르 소남 체첵은 몇 번이고 자수를 쓰다듬으며 손끝의 감각으로 천에 담긴 과거의 이야기를 쓸어보곤 했다.

     “잊지 말아라. '우리'의 이름은 지상의 태양을 말하는 거란다.” 쪼글쪼글한 손가락은 익숙한 인공 태양이 아닌, 가로막힌 천장을 가리켰다. 귀에 닳을 만큼 익숙해진 기계 소리가 불쑥 공간을 메웠다가 사라진다. “… 나의 착한 나르. ” 그 손은 다시 한번 어린 손주의 뺨에 닿는다. 진저는 언제나와 같은, 그러나 이제는 빛을 잃고 물기가 차오르는 눈을 마주한다. 너를 만나서 행복했다고 말하는 가쁜 숨이 섞인 작은 목소리를 듣는다, 기억한다.  삶의 고난만큼이나 거칠한 그 손에 제 얼굴을 문지른다. 이제는 뺨에 닿은 이 손이 이제 얼마나 작고 연약한지를 안다.

     그날에도 다른 이들은 무탈한 날을 보냈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인사를 하고 식사를 물어보고 자신의 일상을 이어가는 날이 여전했을 것이다. 진저 나르 브라운은 몇 번 얼굴을 마주했던 나르의 성씨를 가진 이들에게 인사한다. 그들은 나르 소남 체첵의 나르들이었다. 그들을 알게 된 지 몇 년이 되었지만, 서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들의 나르는 이름의 제일 앞에 있었고, 아멜리아 브라운의 이름에는 나르가 없었다. 이제까지 진저 나르 브라운의 가족에게는 나르가 둘뿐이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하나만 남았다.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고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해가 뜨지 않는 밤이 이어진다. 인공태양의 빛은 언제나처럼 무탈했고 지하는 평온했다. 그들이 상상했던 천장보다 높은 곳은 아직도 닿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남아있다.

     언젠가 빛이 미약하면 어둠에 묻힌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그럼에도 빛을 보았기에 그대로 침식되진 않을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내놓은 적이 있었다. 경험하지 않은 일은 직접 겪기 전까지는 얼마나 가벼운 일인지. 돌아오지 않는 빛은 어떻게 바라야 하는지, 바라도 되는 일인지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가 없었다. 고민이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하자 상상으로 쌓아 올린 꿈의 세계에 태양이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이어서, 형형한 색상 역시 눈 깜박할 사이에 색을 빼앗겼다. 색을 잃은 형태는 느리게 말라가는 흙인형처럼 바스러지고, 결국엔 마른 흙이 손끝에서 흩어져 내린다.

 

     진저 나르 브라운이 그제야 비로소 인식한 것은, 지하는 흙에 둘러싸인 곳이라는 새삼스럽고도 명확한 사실이다. 



7cd96663aaa5cd215f2d077d0d75fa03_1642438665_5248.png








메인 로고
COPYRIGHT © 2021 by Swallowtail
CLOSE